'마음의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10/01/31 김형철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 축사
  2. 2010/01/14 김형철 “이론과 현실 꿰뚫는 한국의 스티브 잡스 키워내는게 내 할일”
  3. 2009/06/05 김형철 계획
  4. 2009/02/09 김형철 Colonel Harland Sanders(KFC 할아버지)
  5. 2009/01/27 김형철 진흙
  6. 2009/01/03 김형철 부모님의 나이
  7. 2008/07/20 김형철 부의 미래

  지금 이 순간 세계는 또 하나의 IT혁명 바람에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만들고 키운 애플이 아이폰에 이어 아이패드를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대학을 겨우 6개월 밖에 다니지 않고 자퇴한 청년 스티브 잡스가 처음 애플 컴퓨터와 맥킨토시를 발표했을 때 세상은 경이로운 정보혁명을 겪었습니다. 그후 수십년간 계속되는 기술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도 세계적인 IT국가로 급성장하였고, 삼성전자와 LG등은 글로벌 IT강자로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를 출시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 연설을 들으면서 5년전에 보았던 그의 명연설이 떠올랐습니다. 실리컨 밸리 이웃에 자리한 명문 스탠포드 대학교의 졸업식에서 행한 연설입니다. 자신의 출생비밀을 포함하여 췌장암에 걸려 죽음에 맞섰던 이야기, 친구와 동업한 애플의 성공과 실패담등 진솔한 체험 고백입니다. 무엇보다 대학을 마치고 사회에 나아가는 졸업생의 인생진로에 대한 절박한 충고의 말들은 한국의 졸업생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곧 졸업시즌을 맞는 한국대학가에 그의 연설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한국에 가지는 못하지만, 이 연설문을 우리 젊은이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때 영어영문학과 수업을 들으면서 배웠더 연설문인데.. 제가 번역한것은 아니구..-_-;; 한번쯤은 읽어볼만하다구 생각되어서 올립니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 축사>

 


연설문 펴기

2010/01/31 23:48 2010/01/31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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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벤처의 전설’ 안철수 KAIST 석좌교수에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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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그를 존경했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프로그래머로 변신하다니…. 그 독특한 삶의 궤적이 중학생의 마음을 매혹시켰다. 어른이 되고 기자가 된 뒤에는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기자와 인터뷰를 한다는 사실에 긴장하고 상기된 얼굴을 하던 숙맥 같은 최고경영자(CEO)였다. 내 어린 시절 영웅의 모습은 닳고 닳은 비즈니스판의 냉혹한 승부사들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 다름이 나를 더욱 매혹시켰다.

지금은 그를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게 됐다. 5년 전만 해도 ‘안철수’라는 이름은 ‘기업가’였고 정보기술(IT) 업계의 ‘벤처 신화’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벤처업계에서 아는 사람들만 아는 골목대장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뒤 그는 존경할 사람이 드문 이 시대에 존경을 받는 유명 인사가 돼 있었다. 그는 이제 골목대장이 아니라 사령관이다.》

KAIST 수업 인기 많아 기업가정신
불꽃 토론

강의 끝나면 학생 절반 “창업하겠다” 진로 바꿔
“아이폰 등장, - 비즈니스문화 정면충돌 사건”

2007년 우연한 기회로 그의 삶에 대한 책을 쓰게 됐다. 내 첫 저서였다. 책으로 묶인 것을 읽고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때 ‘안 박사’(안 교수, 안 의장 등은 영 어색해서 그렇게 부른다. 그도 좋다고 했다)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책은 머리로 낳은 자식입니다. 아무리 모자란 점이 있어도 결국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지난해에는 스티브 잡스 애플 CEO에 대한 책을 썼다. 새 책에 서명을 해서 그에게 선물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안철수연구소 사무실로 찾아갔다.

마침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맞아준 안 박사에게 나는 그저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몇 개 던졌다. 하지만 그는 현명한 답변을 길게 해줬다. 인터뷰를 하려고 만난 게 아니었는데, 대화를 끝내고 보니 인터뷰처럼 돼버렸다. 우문현답을 독자들께 소개하고 싶었다. 그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안철수 KAIST 석좌교수가 동아일보 독자 여러분께 보내는, 약간 늦게 도착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키우다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돼 후배 기업가를 돕겠다고 했다. 그런데 교수가 됐다. 좀 실망스럽다. 기업인을 키우는 걸 포기한 것인가.

“그때 벤처캐피털리스트가 아니면 교육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교육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업인을 키우는 걸 포기한 건 아니다. 안철수연구소에서 ‘고슴도치플러스’라는 사내 벤처를 운영한다. 이 회사는 조직과 구성은 그냥 사내 팀인데 기존 업무에선 완전히 손을 떼고 다른 일을 한다. 고슴도치플러스의 모든 중요한 결정에 나도 함께 참여해 논의한다. 그동안 한국의 벤처기업인들이 실패의 경험을 배우지 않고 무조건 해보는 식으로 사업을 한 경우가 많다. 이런 방식은 성공률만 떨어뜨린다. 난 그런 의미에서 사내 벤처를 키우며 그들에게 내가 실패한 경험을 알려준다. 초기에 겪는 실수는 사실 책에서 배운 지식대로만 해도 겪을 필요 없는 사소한 게 대부분이다. 이론이 곧 현실에 적용되니까. 그런데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고 지레 생각하고 배운 지식과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걸 바로잡아주려는 것이다.”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거라고 말했었는데….

“벤처캐피털을 하려고 했더니 많은 분께서 한국에는 벤처에 투자할 ‘돈’은 있는데 ‘투자할 벤처기업’이 없다고 하시더라. 기업이 없는데 돈만 있으면 어디에 투자하겠나. 그래서 벤처캐피털보다 기업인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매주 한 번씩 내가 있는 대전(KAIST)과 서울(안철수연구소)을 연결해 고슴도치플러스와 화상회의를 한다. 두세 가지 사내 벤처를 더 만들려고 진행 중이다. KAIST에서 기업가정신 과목을 담당한 것도 이런 이유다.”

―KAIST 수업이 인기가 좋다고 들었다.

“그렇다. 나도 놀랐다. 아마도 토론식 수업과 다양한 방식 덕분일 거다. 전통적인 방식의 강의를 하는 교수님들과 내 강의가 차이가 좀 있으니까. 예를 들면 난 내 강의에서 꼭 잡스 CEO의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를 들려준다.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고도 다시 복귀해 그 회사를 1위로 만드는 기업가정신에 대해 토론하는 식이다. 그랬더니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 가운데 절반이 갑자기 창업을 하겠다고 진로를 바꾸더라. 처음엔 겁도 났다. ‘내가 뭔데 저들의 인생을 바꾸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리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방향을 진심으로 학생들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내 학생들이 내 진심에 영향을 받아 변화해 준 것이다. 이건 고마워할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난 내가 한국 사회가 더 좋은 사회로 바뀌려면 이렇게 했으면 한다는 생각을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그들이 그렇게 바뀐다면 한국 사회도 좋아질 거라 믿는다.”

―안철수연구소에서 CLO(Chief Learning Officer)라는 직함도 갖고 있다던데….

“교재도 내가 만들고 강의도 내가 하는 일종의 사내대학이다. 모든 사원을 다 불러 모아 1년에 한 번 3박 4일 정도 집중 교육하는 코스다. 지난해 8월에는 ‘전략’을 주제로 사내대학을 열었다. 기업이 얘기하는 전략이란 건 일반인들이 쓰는 전략이란 말과 다른 개념인데 이걸 전혀 모르고 혼동해 사용하는 직원이 많았다. 그래서 기본적인 전략 개념을 강의했다. 2010년에는 마케팅을 다뤄볼 예정이다. 회사원이라면 알아야 할 기본 개념이니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가 왔다. 전화기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전원을 껐는데 안 교수가 이를 보더니 한국과 미국의 비즈니스 방식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다. 기자의 전화기는 애플의 ‘아이폰’이다.

“아이폰은 단순히 경쟁력 있는 외국 제품 하나가 들어온 게 아니라 한국의 비즈니스 문화가 미국의 비즈니스 문화와 정면충돌한 큰 사건이다. 내가 알고 배워왔던 미국의 비즈니스 문화는 수평 네트워크다(안 박사는 미국 유학 시절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에서 직접 일을 하기도 했다). 미국에선 작은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주변에 몰려 하나의 생태계를 구성한다. 대기업은 이런 작은 기업들의 모험과 혁신에서 미래의 성장동력을 찾고, 이들이 더 모험적이고 혁신적인 기술에 도전할 수 있도록 이들의 큰 고객이 되어준다.”

―한국의 비즈니스 문화와 많이 다른 것 같다.

“한국의 비즈니스 문화는 수직적 문화다. 대기업이 하청기업을 거느리고 하청기업에서 가치를 쥐어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한다. 그동안의 압축 성장에는 맞았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론 어려울 것 같다. 그동안 아이폰이 들어올 수 없게 막고 또 막았던 데는 이유가 있다. 소프트웨어 업체의 살길을 만들어주며 더 큰돈을 벌어들이는 애플과 같은 사업 모델을 국내 대기업은 못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문화가 갑자기 ‘쾅’ 하고 정면충돌해버렸다. 결국 이건 한국 기업에 엄청난 충격이 될 것이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성공한 건 수많은 게임업체가 소니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게임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한국엔 이런 모델이 없고 뭐든 한국 대기업이 다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기업에서 의사 결정하는 높은 분들이 워낙 수직 구조에만 익숙해서 수평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실까 걱정이다.”

○ 계속 기업인을 키울 것

―활동이 많다 보니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요새 부쩍 그런 말 많지만 절대 아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걱정이다. 지금까지는 선거 시즌에 외국에 나갈 일이 많아서 핑계를 댈 수 있었다. 그런데 2010년 6월은 학기 중이라 외국도 못 나가는데 하필 딱 선거 시즌이다. 어떻게 정치 입문 권유를 뿌리쳐야 권하시는 분들 마음이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그래도 특정 정당을 편들어 본 적은 없다. 지금 대통령직속위원회 활동과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함께하는 걸 보라. 난 정치적으로 편이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후 책은 안 쓰나.

“새 책을 쓰고 있다. 5년 만이다. 그런데 바쁘다 보니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조만간 마무리할 계획이다.”

―TV 프로그램인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사실이 화제가 됐다.

“그게 참 재미있다. 나를 아는 분들이 방송을 보고 나서 늘 하던 얘기를 지겹게 또 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게 인기다. 내가 깨달은 건 그동안 나나 내 주위 사람들이 IT 업계라는 좁은 우물 안에만 갇혀 있었던 거다.”

―(기업인으로서) 좋은 역할을 하셨다는 평가가 많다.

“기업인의 역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요즘 미국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하면서 강조하는 분야가 커뮤니케이션이다. 기업 내부와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지만 사회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역할도 늘고 있다. 나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기업인들도 그런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 주셨으면 싶다.”

약속했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다음 약속이 있다는데 얘기가 그치질 않았다. 옆에서 안철수연구소 박근우 홍보팀장이 눈짓을 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걸 알고 있고 안 박사 자신도 다음 약속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쉽지만 악수를 하고 일어섰다.

안 박사는 ‘무릎팍 도사’ 촬영 때에도 한 시간 방영 분량을 찍기 위해 네 시간을 쉼 없이 녹화했다고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게 인생의 전부인. 이렇게 최선을 다한 순간들이 쌓여 의사가 되고, 프로그래머가 되고, 사장이 되고, 교수가 됐다.

그 모든 게 그냥 ‘안철수’였다.

○ 안철수는 누구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고 의대생 시절 컴퓨터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들어 ‘컴퓨터 의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군의관으로 입대하는 날 새벽까지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다가 가족에게 군대에 간다는 말조차 못하고 입대한 일도 있다. 1995년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를 세우고 기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경영에 대해 전혀 몰랐던 터라 미국 유학을 떠나 낮에는 경영학을 공부하고 밤에는 e메일로 회사 일을 챙겼다. 2005년 안철수연구소가 자리를 잡자 성공한 벤처기업가의 자리를 내던지고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2008년 한국에 돌아온 뒤 KAIST 석좌교수를 맡아 학생들에게 기업가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2010/01/14 20:49 2010/01/14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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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마음의 이야기 RSS Icon ATOM Icon 2009/06/05 23:37 김형철
어째든 계획은 없는 것보다 있는것이 낫다.


당신은 이미 계획을 세워 놓았다. 계획은 지도이자 지침서이며 목표다.

계획은 당신이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어디에도 도착해 있을 건인지를 알려준다.

계획은 당신의 생활에 전체적인 구조와 틀, 그리고 구심점과 에너지를 제공한다.

만약에 당신이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인생의 보물이 저절로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당신은 아주 빠른 속도로 강물을 따라 하류로 떠내려가가게 될 것이다.

물론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그 계획을 모두 실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지도가 당신을 보물섬으로 데려다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지도와 삽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 곳이나 무턱대고 파헤치는 것보다는

보물을 찾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계획이 있다는 것은 인생에 관해 오랫동안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두 손 놓고 앉아 뭔가가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자신의 인생에 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크고 작은 일들이 닥칠 때마다 계속

놀라고 당황하기만 할 것이다.


인생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 분명히 파악하고 그것을 목표로 계획을 세워라.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그 단계들을 차근차근

실천해 나가라.

일단 계획을 세우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들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일단 길을 잃은 때마다

지도를 보며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금세 알고 해매지 않을 수 있다.


계획을 세웠다고 해서 어떤 일이 있어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계획대로 따라야 하는

건 물론 아니다.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일 뿐이다.

다시 말해 당신은 상황에 따라 계획을 재검토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수정할 수 있다.

상황은 변하고 당신도 변하며 당신의 계획도 변할 수 있다.

계획의 세부사항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문제다. 전체적인 계획만으로도 충분하다.

계획은 당신이 믿도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구심점이다.

인생이 잘 풀리는 것 같지 않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거나 삶에 지쳐 있을 때 사람은

쉽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잊어버리거나 회의적으로 변하기 쉽다.

하지만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낙관과 혼란에 부딪혀도 전체적인 큰 그림을

쉽게 기억해내고 현재 상태를 점검할 수 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궤도로 되돌아갈수 있고 다시 시작할수 있다.



" 뭔가를 이루고 싶어하면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건 영원희 꿈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2009/06/05 23:37 2009/06/05 23:37

Colonel Harland Sanders(1890~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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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세에 사업 실패,
105달러의 사회보장연금으로 생활연명.
그러나 74세에 600여개의 체인점 사장으로 재기 성공,
90세에 전 세계 80여개국에 체인점 설립


  인생은 60세부터 라는 말이 있던가. 65세라는 결코 적잖은 나이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해서,
세계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 바로 ‘켄터키 할아버지’ 로도 유명한 KFC의 창업자 커넬 할랜드 샌더스(Colonel Harland Sanders)이다.
 
  그는 1890년 9월 9일 생이다. 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그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일을 해야만 했고, 어린 커넬은 3살짜리 남동생과 어린 여동생을 스스로 돌봐야만 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집에서 요리를 자주하게 되었다. 7살이 되던 해에 그는 웬만한 요리는 곧잘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가 10살 되던 해, 농장 근처에서 월 $2을 받으며 처음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커넬이 12살 때, 그의 어머니마저 재혼을 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치며 그의 젊은 시절을 보내고, 마침내 철도소방원이 되었다. 그는 법도 배웠으며, 보험 외판도 했으며, 오하이오강의 유람선에서도 일했으며, 타이어도 팔았고, 편의점이 딸린 주유소에서도 일해 보았다. 그러다가 22세 때 램프 제조판매업을 시작했는데 그만 망하게 되어 그동안 모은 모든 재산을 탕진해 버렸다. 그러나 또 열심히 일하여 조그마한 가게를 경영하기에 이르렀으나 39세 때 미국의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또 다시 전재산을 날려버렸다.
 
그가 40살이 되던 해, 그는 켄터키주 코빈(Corbin, Kentucky)의 조그마한 주유소에서 일을 했었으나, 이 때 다시 아들마저 죽는 슬픔을 겪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 주유소를 지나가던 한 손님의 내 뱉은 "이 마을에는 먹을 것이 없어!" 라는 한 마디의 불평은 그의 평안한 인생에 일대 전환점을 가지고 오게 된다. 평소 요리를 좋아했던 그는 주유소에서 안 쓰는 창고에서 닭튀김 요리를 조금씩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당시 프라이팬으로 닭요리를 하던 것과는 달리, 그는 압력솥을 이용한 속성 닭튀김 요리법을 개발했고, 그 주유소에 들른 배고픈 방문자들에게 요리를 해 주기 시작했다. 돈이 없었기에 본격적으로 레스토랑을 운영한 것은 아니었고, 주유소에 들르는 여러 여행객들에게 손수 만든 음식을 분식점규모로 제공한 것이었다. 점점 더 그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자, 그가 일하던 주유소 건너편에 142명이 앉을 수 있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 후 커넬 샌더스의 식당 이름은 점점 더 퍼져나갔다. 주지사 루비 라푼(Ruby Laffoon)은 그의 치킨을 켄터키주의 대표적인 요리로 승화시킨 것을 기려 커넬을 켄터키주의 명예 대령(Colonel: 커넬)으로 칭하였다.(※참고: 영국이나 중세 왕정 시대 나라에 위대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백작이나 공작의 칭호를 내리는 것에서 유래). 그리고, 1939년도에 커넬의 식당이 맛있는 음식점등을 소개하는 잡지 던칸 하인즈 "Adventures in Good Eating"에도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같은 해에 식당에 원인모를 불이 나서 식당이 전소되는 비극이 다시 찾아오게 된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커넬은 또다시 조그마한 식당을 열게 된다.
 
  그런데 1950년대 초, 갑작스레 미국에 들이닥친 경제 불황과 경영부실로 인해 그의 레스토랑은 다시금 문을 닫게 되고, 환갑이 넘은 커넬은 국가에서 받는 사회보장기금 단돈  $105를 가지고 그의 생활을 근근히 이어가는 마치 노숙자같은 불쌍한 삶을 살게 된다.
 
  급기야는 하는 사업마다 망한 절망감과 아들마저 잃은 충격으로 커넬 샌더스는 정신병까지 앓게 된다. 정신병때문에 결국 사랑하던 그의 아내마저도 그를 떠나 버리게 된다. 그 때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다음은 그의 간증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절망과 낙심과 상처 속에 괴로워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어디선가 노래소리가 들려 오더라는 것이다. 그 노래소리를 듣는 순간, 커넬은 마치 그 소리에 취한 듯이 그 소리가 나오는 곳으로 따라 갔다.
그래서 다다른 곳은 어느 조그마한 교회 예배당이었다. 그 예배당 앞에 어떤 한 미친 여자가 앉아서 너무나 평화롭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바로 그 노래소리는 바로 찬송가 소리였다.
 
  이 찬송소리를 듣고 커넬 샌더스는 그 여자 옆에 앉아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주님, 이곳에도 주님이 계시는 군요. 미친 여자가 있는 바로 이곳에도, 주님은 계시는 군요. 제가 평생 예수님 없이 돈만 벌려고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한참 동안 울며 회개의 기도를 하다가 커넬은 갑자기 정신이 맑아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로 병원에서 검진해보니 정신병이 완전히 나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다시금 진실된 크리스천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던 중, 어느날 기도 중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닭고기를 만들어 팔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게 된다. 물론 이전에도 양념에 대한 감각이 있긴 했지만 닭고기를 어떻게 양념하여 팔아야 할지 몰랐던 차였는데, 그냥 몇 가지 양념을 준비해서는 불을 피우고 기름 솥에 닭고기를 넣고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따라 이것 넣으라 하면 넣고, 저것 넣으라 하면 넣고 해서는 닭튀김을 만들게 되었다. 그 길로 길거리에서 KFC라는 간판을 붙여 놓고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판매를 시작했는데 이게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닭고기는 당시에 ‘목사고기’ 라고도 했다. 그 당시 목사님들이 가난해서 다른 비싼 고기를 사먹지 못하고 주로 닭고기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은 2차 대전 후 제대한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형편들이라 주로 이 닭고기를 많이 사먹었다고 한다.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용기를 얻고 이제는 압력밥솥과 튀김양념을 직접 가지고 다니며, 인근 식당 주인들을 찾아 다녔고 공짜로 튀긴 치킨맛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요리법을 전수해 주는 대신, 닭 한 마리당 5 cent(약 50원) 정도의 값싼 로열티를 받는 조건으로 사업을 계획했다. 하지만 계획만으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는다.
 

  한 겨울 시린 찬바람이 콜로라도 평원을 휩쓸던 날, 어느 레스토랑 앞.

  새하얀 양복을 멋지게 차려 입은, 뚱뚱한 체구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사람이, 마치 온 세상의 고민을 몽땅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쓸쓸히 서 있었다.

  ‘이번이 벌써 999번째 퇴짜구나.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게 무슨 비참한 꼴이냐.’

  이런 생각이 들자, 그때까지 낙담이라고는 몰랐던 노인에게도 슬픔이 밀물처럼 몰려와,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그 때, 골목에서 놀고 있던 아이 몇 명이 다가와,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하얀 옷을 입었어요. 그리고 왜 아까부터 계속 눈을 감고 서 있기만 하세요.”

  그러자 노인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쓱 닦고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음, 이 할아버지는 말이야. 몇 년 뒤 이곳에 커다란 식당을 하나 지을 거란다. 장사가 너무너무 잘돼서, 요리를 먹으려는 사람들이 도시의 끝까지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가 될 거야.

  할아버지는 오늘처럼 하얀 옷을 입고, 손님들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할 거란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너무 맛있어서 뼈까지 녹는 듯한 환상적인 치킨요리를 드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이지.

그  걸 상상하고 있자니, 가슴이 떨려서 움직일 수조차 없을 지경이란다. 현재를 보면 슬프기도 하지만, 미래를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기만 하구나. 이 할아버지는 또다시 꿈을 행해 나갈 거란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도 10번의 실패를 더 맛봐야 했다. 이 노인의 이름은 커넬 할랜드 샌더스로, 당시 67세였다.

  그는 자신의 치킨요리 프랜차이즈 계약을 따내기 위해, 미국 전국을 돌아다니는 중이다.

  잠은 유일한 재산인 낡은 포드승용차에서 자고, 세면은 공중화장실에서 하고, 식사는 스스로 만든 닭튀김으로 해결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치킨을 맛있게 튀기는 기술뿐이었다. 그는 레스토랑 주인에게,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맛있는 치킨요리법을 가르쳐주고 로열티를 받는 사업을 구상해냈다.

  당시는 프랜차이즈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그의 발상은 새로운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레스토랑 주인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잡상인으로 오해해 설거지 물을 끼얹기도 하고, 아들뻘 되는 사장이 “이제 그만 나이를 생각하고 쉬세요”라며 거만한 설교를 늘어놓기도 했다.

  나중에 전기작가들은 “그는 2년 동안 아무 일도 안하고, 오직 거절당하는 일에만 종사했다”고 썼다.

 3년 넘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려 1009곳에서 거절을 당했지만, 그는 ‘나에게 은퇴라는 말은 없다. 어떠한 역경이 닥쳐와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계속 움직일 것이다’라고 다짐하며, 새로운 꿈을 향해 전진해 나갔다.

  그는 무수한 거절의 말을 들으면서도, 결코 “내 요리는 형편없어. 나는 아마 실패할거야”라고 말하지 않았고, 언제나 “내 요리는 완벽해. 나는 성공할 거야”라고 말했다.

  “실패와 좌절은 인생 살면서 겪는 공부”

  그는 절망 대신 희망을 가졌고, 우는 대신 웃었으며, 방황하는 대신 행동했다. 자신을 박대한 사장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자포자기하는 대신 세상을 감싸안았으며, 항상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68세 때 1010번째 찾아간 레스토랑에서 첫 계약을 따낸 것이다.

  첫 계약자는 피터 허먼이었다. 샌더스의 치킨 맛에 매료된 허먼은, 치킨 한 피스당 4센트의 로열티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또 켄터키프라이드치킨이라는 이름도 제안했다.

  하늘의 도움이 있어서인지 그의 닭에 대한 소식은 더욱 더 유명해져서 그가 74세가 되던 해인 1964년경에는,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하여 600개 이상의 엄청난 프랜차이즈 매장으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돈이 굴러 들어오는데 정말 정신이 없을 정도라고 그 당시를 회상한다.  

  이렇게 출발한 KFC는 현재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약 1만3000여 곳의 매장을 가진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로 성공했다.

  KFC의 오너는 계속 바뀌었고, 그가 사망한 지 벌써 26년이 지났지만, 샌더스는 여전히 KFC를 상징하는 인물로 남아 있다. KFC 로고에 있는 온화한 미소의 할아버지가 바로 그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훌륭한 생각, 멋진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뭅니다. 저는 남들이 포기할 만한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는 대신, 무언가 해내려고 애썼습니다.

  실패와 좌절의 경험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공부의 하나랍니다. 현실이 슬픈 그림으로 다가올 때면, 그 현실을 보지 말고 멋진 미래를 꿈꾸세요.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세요. 인생 최대의 난관 뒤에는 인생 최대의 성공이 숨어 있답니다.”


  그의 삶에서 우리에게 더욱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은, 재기에 성공한 그가 자신의 경영능력의 한계를 알고, 자신보다 더욱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을 후에 켄터키 주지사가 된 존 브라운에게 KFC 회사를 저렴한 가격으로 팔고, 자신은 그 회사에서 오히려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자문과 홍보를 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온 미국과 캐나다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간증하는 삶을 살았다.
 
  보통 회사의 CEO 같았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그런 그의 존경스런 인격때문에 커넬은 그 후에도 KFC를 대변하는 인물로 계속적으로 남게 되었고, 1976년도에는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존경받는 유명인으로 조사되었다.
 
전문 경영 기술을 가진 새로운 주인 아래에서의 KFC는 더욱 그 성장의 속도에 가속이 붙게 되었다. 1966년도에 KFC의 주식을 공개하게 되었고, 1969년도에는 NYSE(뉴욕주식거래장)에 상장 되었으며, 1971년도에는 회사에서 직영으로 운영하는 매장이 3,500개 이상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1986년도에는 약 8억 4천만 달러(9,660억원)의 자산의 큰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기업이 가장 잘 성장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알기에, 자신보다 더 훌륭한 사람에게 그 자리를 양보한 커넬의 결단으로, KFC는 더욱 큰 이익과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고, 더불어 자신도 그 인격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 실패와 좌절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의 삶에 상처와 고난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환경 앞에 나이 앞에 포기하지 않는 자신의 비전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손을 대야할 때와 손을 떼야할 때를 명확히 알고 실천할 수 있다면 자기자신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과 강인한 절제력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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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KFC 가서 맨날 보았던 할아버지 동상..
왜 서 있을까 하고..생각 없이 다녔지만..이런저런 사연이 있었다니..
수많은 실패를 하고도 포기 하지 않고 74세에 성공하신 커넬 샌더슨.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뿐. 성공이라는 공식과는 무관한 것 같다.
끊임없는 노력이야 말로..성공이라는 공식이 아닐까..
2009/02/09 20:18 2009/02/09 20:18

진흙

마음의 이야기 RSS Icon ATOM Icon 2009/01/27 19:30 김형철
나는 진흙.

타인을 꽃이 되게 하라.



삶을 살아가면서...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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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7 19:30 2009/01/27 19:30

부모님의 나이

마음의 이야기 RSS Icon ATOM Icon 2009/01/03 07:36 김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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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나이는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오래 사신 것을 기뻐하고

또 한편으로는 나이 많은 것을 걱정해야 한다.

- 논어 -


2009년.. 한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오면서..

내 나이도 한살 더 먹었지만

부모님 또한 나이가 들었을것을..

우리들은 부모님 나이 한번 생각 하지 않는 것 같다.

새해에는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2009/01/03 07:36 2009/01/03 07:36

부의 미래

마음의 이야기 RSS Icon ATOM Icon 2008/07/20 18:02 김형철
2008/07/20 18:02 2008/07/20 18:02